에세이

“변색 손톱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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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호준교수 댓글 0건 조회 549회 작성일 22-09-0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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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색 손톱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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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처음으로 염색했다. 몇 달 전에.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교인들은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아마 속으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목사님, 그러시면 안 되죠. 우리가 알고 있는 목사님이 아니네요!”라고 어떤 권사님이 핵폭을 투척한다. 그때부터 고민이 생겼다.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쭉 가야 하나? 그런 사이에 미국에 갔다. 하얀 머리가 조금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낭보가 들려온다. 카이스트의 한 화학과 교수가 염색약이 아닌 갈변(褐變) 샴푸를 발명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떤 물질이 갈색으로 변색하는 현상을 갈변(褐變)이라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산화(酸化) 현상이라 한다. 찾아보지도 않고 큰딸에게 하나 주문해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아마존을 통해 받았다. “모다모다”다. 염색약이 아니라 샴푸라서 괜찮다고 나를 다독거렸다. 그리고 모다모다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순종했다. 일반 샴푸 사용하듯 머리를 감았다. 대신에 샴푸 한 채로 3분 정도 공기가 닿도록 하라는 말씀이었다. 샴푸의 특정 성분(폴리페놀 옥시데이스)이 공기 중 산소와 접촉하면 머리카락 색깔을 변화시킨다는(갈변) 과학적 근거까지 각주로 달아 놓으셨다. 


2주 이상을 성실한 자세로 그 말씀에 순종했다. 샴푸 하면서 오로지 머리에만 신경을 썼다. 어느 날 우연히 내 손톱 색깔이 이상해진 것을 발견했다. 걱정이 들었다. 내 몸에 무슨 이상한 병이 생겨서 손톱 색깔이 변해가는구나. 아마 이제 갈 때가 점점 가까이 온다는 사인인가? 일주일 이상을 시무룩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머리카락이 변색 되는 것만 알았지, 샴푸를 묻힌 손톱 색깔이 변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제&^%^&%. 사람이 한 가지에만 몰두하다 보면 그 밖의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변색한 손톱, 갈변한 손톱 색깔. 어찌하오리까? 귀국하자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조언을 들었다. 위로하느라, “그냥 계속 모다모다 샴푸 사용하세요, 하실 때 꼭 비닐장갑을 끼고 하세요. 아니 라텍스 장갑이 더 좋을 거예요.” 등등. 


그런데 봉숭아로 물들인 것 같은 손톱은 어쩌란 말인가? 매일 들여다본다. 설교 후 축도할 때도 손톱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지만 허사다. 주먹 쥐고 축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며칠 전 교회에서 내 신간《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저자 사인회가 있었는데, 사인하면서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들을 차마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사인을 하는데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오늘도 갈변한 손톱을 한참 쳐다본다. 갑자기 별거 아닌 시시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온다. “불쌍한 아들아, 시간과 함께 손톱은 자란다. 흰 손톱이 아래로부터 밀고 올라오면서 갈변한 손톱을 밀어낼 것이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아들아, 시간이 흘러야 한다.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맞아, 내가 저지른 더러운 자국도 아무리 지우려고 애를 써 봐야 소용없겠지. 누가 뭐라 해도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리고 나의 단견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 시간은 흐른다. 이 순간에도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어느 날 다시 하얀 손톱으로 회복될 날이 오겠지. 그래, 세월이 약이겠지. 기다리는 수밖에. 세월을 낚으며 기다리는 것이 고단한 인생살이에 최고의 덕목인가? 이상은 변색 손톱 유감(有感)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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